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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 엔지니어링 서비스 90년간 이어온 전통을 통한 혁신

by 모빌리티그라운드 202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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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드 포르쉐가 1931년 슈트트가르트 엔지니어링 사무실을 설립한 이후 포르쉐의 이름은 엔지니어링 서비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9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포르쉐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짧은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페르디난드 포르쉐가 슈트트가르트에 'Dr. Ing. h.c.F.Porsche Gesellschaft mit beschränkter Haftung, Konstruktion und Beratung für Motoren- und Fahrzeugbau'라는 이름으로 엔지니어링 사무실을 설립했을 때, 1931년 4월 25일에 이미 자동차 제조업체로 상표를 등록한 상태였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세계적 경제위기 상황의 절정에서 위험한 행동을 한 것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무실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1930년대 자동차 개발의 가장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토 유니언 레이싱카가 3개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다

 

엔지니어링 사무실은 1931년 봄 자동차 제조사인 'Wanderer'로부터 최초의 공식적인 주문을 받았다. 내부에서 Type 7으로 불리며 포르쉐는 섀시는 물론 1.5리터 6기통 엔진을 설계했다.

같은해 처음 완성된 자동차는 8기통 엔진을 장착한 포르쉐 Type 8이었다. 하지만 실제 양산은 되지 않았다. 1933년 봄, 페르디난드 포르쉐는 오토 유니언으로부터 16기통 레이싱카 개발을 의뢰받았다. 1933년 11월 오토 유니언 레이싱카의 최초 테스트 드라이브가 진행되었으며, 1934년 첫 시즌에만 3개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3개의 국제 그랑프리와 다수의 힐클라임 레이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그의 사무실은 1933년부터 값싼 소형차를 만드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폭스바겐의 프로토타입 디자인을 해달라는 주문을 받게 되었다. 1936년, 독일 정부는 폭스바겐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페르디난드 포르쉐는 이 공장을 책임지게 된다. 

동시에 엔지니어링 사무실에도 다양한 주문들이 들어어오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공랭식 2기통 엔진을 장착한 Type 110 트랙터가 있었는데, 이 모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Volkstraktor'라는 트랙터 시리즈의 기본이 되는 모델이었다.

 

페리 포르쉐(Ferry Porsche)와 함께 새로운 시작

 

슈투트가르트에 대한 공습이 계속되면서 엔지니어링 사무소는 1944년 오스트리아 카린시아 지역의 그뮌드(Gmünd)로 이전했다. 전쟁이 끝난 후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1947년 4월, 페르디단드 포르쉐의 아들인 페리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도전을 했고, 그의 여동생 루이지피헤이와 함께 그뮌드에 본사를 둔 포르쉐(Porsche Konstruktionsbüro GmbH)를 설립했다. 전쟁 후 첫 대량 주문은 이탈리아의 스포츠카 및 레이싱카 제조사였던 치시탈리아(Cisitalia)에서 들어왔다. 그 결과로 만들어 진 1947년의 Type 360 레이싱카에는 두개의 긴 컨트롤암이 프론트에 있고, 더블 조인트 스윙 액슬이 리어에 있는 4륜 구동을 갖춘 최첨단 섀시가 탑재되어 있었다.

1947년 봄, 페리 포르쉐는 스포츠카를 만들기 위한 그의 첫번째 아이디어를 냈으며 디자인 넘버 356번을 부여받았다. 1948년 2월, 양산형 모델을 위한 섀시가 생산되었고 그 이후 유선형의 알루미늄 로드스터 보디도 생산되었다.

포르쉐 356 'No.1' 미드십 엔진 로드스터 스포츠카는 1948년 6월 8일 카린티안 지방 정부에서 공식적인 도로주행 허가를 받으며 모든 이들의 축복을 받았다. 이것은 포르쉐가 스포츠카 브랜드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리어엔진을 장착한 포르쉐 356/2의 생산은 1948년 하반기부터 시작되었다.

자동차 제조사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엔지니어링 서비스는 포르쉐의 서비스 분야에서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스터드베이커 코퍼레이션과 같은 해외 고객들도 포르쉐의 사무실을 신뢰하고 있었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포르쉐는 미국 자동차 제조사를 위해 현대식 폰툰(pontoon) 디자인에 셀프 서포팅 보디의 4도어 세단을 개발하기도 했다.

씽크탱크

 

포르쉐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다양한 디자인 테스트였다. 1953년부터 슈투트가르트 인근 30km 덜어진 몰스하임의 작은 공항이 특정한 테스트를 진행하기 위한 곳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점점 복잡해지는 개발 과정으로 인해 테스트 부서의 요구와 선호에 따라 전용 테스트 트랙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61년 10월 16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바이작과 플라흐트에 테스트 트랙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스키드 패드(Skid Pad)'로 불리는 원형 트랙은 두개의 서킷으로 구분되어 일반적인 주행 성능테스트와 횡방향 가속도를 테스트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특별한 설계를 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파여진 도로와 울퉁불퉁한 노면을 가진 도로를 만들어 다른 부분들도 테스트 할 수 있게 했다.

포르쉐는 1960년대 성장을 하기 시작했고, 1963년 포르쉐 901을 출시하고 1년 뒤 포르쉐 911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자동차 레이싱 부문의 고객 주문이 증가하면서 개발팀은 더욱 바빠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동차를 테스트 할 테스트 벤치와 워크샵이 필요해졌다. 1960년대 말, 포르쉐 바이작 개발센터의 계획이 마지막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71년 가을, 디자인을 포함한 모든 개발부서가 기존의 주펜하우저에서 새로운 곳으로 이전했다. 

1974년부터는 핵사곤 형태의 건물이 건설되어 작업과 협업을 더욱 긴밀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콘셉트를 넘어서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포르쉐 개발센터에 있는 작은 수 많은 싱크탱크들로 구성된 곳에서 빠르게 중앙에 위치한 '브레인'에게 전달될 수 있게 되었다. 

바이작 개발센터의 성공적인 확장

 

이듬해 개발센터(EZW)는 연이어 확장을 거듭했다. 환경기술 측정센터(MZU)는 1982년 6개의 배출가스 테스트 벤치를 갖추었다. 엔진 테스트 빌딩(PMA)은 1983년 건축이 시작했다.

1986년 5월, 포르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시설의 풍동 실험실을 운영하기 시자했다. 세번째 단계의 시설 건축은 1986년 9월 29일 다양한 충돌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시설로 마감되었다. 이 시설은 날씨와 상관 없이 현대적인 테스트 기술들을 적용하고 새로운 테스트 기술들을 시험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연비 개선과 배출가스 감소, 능동 및 수동적 안전 장비 강화, 기계 부품을 전자장비들로 교체하는 등의 개발이 증가한 것은 고객의 주문과정에서 더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포르쉐 개발센터와 엔지니어링 서비스팀 간의 필요한 업무 협력 정도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리고 포르쉐 라인업의 확대와 카이엔과 같은 럭셔리 SUV 부문으로의 진출은 포르쉐 자체의 프로젝트 관리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프로젝트 관리 측면에서 새로운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포르쉐는 2001년 포르쉐 엔지니어링 그룹을 창립하고 더불어 포르쉐 개발센터 엔지니어링 서비스를 새롭게 개선했다. 그 이후 포르쉐의 모든 고객 프로젝트는 이곳에서 진행되었으며, 포르쉐 내부 스포츠카 개발에 대한 작업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들의 첫 프로젝트 중 하나는 2002년 할리 데이비슨을 위해 개발했던 '레볼루션 엔진'으로 불렸던 수냉식 V2 모터사이클 엔진이었다.

전세계로 범위를 넓히다

 

포르쉐 엔지니어링은 2001년 프라하에 문을 열면서 복잡한 기술 계산과 시뮬레이션을 전문으로 테스트하는 시설을 시작으로 국제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2012년부터 포르쉐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동차 테스트 장소 중 하나인 이탈리아 남부 아풀리아의 나르도 테크니컬 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20개 이상의 테스트 트랙과 테스트 시설이 700 헥타르에 이르는 넓은 곳에 있으며, 포르쉐 엔지니어링은 사운드 테스트, 운전자 어시스턴트 테스트 등의 엔지니어링 서비스도 진행하고 있다.

2014년 포르쉐 엔지니어링의 지속적인 발전에는 2가지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 포르쉐가 16년만에 르망24시간 내구레이스에 복귀해 2015년부터 919 하이브리드를 앞세워 3년 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포르쉐 엔지니어링은 혁신적인 드라이브 콘셉트를 위한 완벽한 에너지 저장 시스템을 개발했다. 기계적 구조에서 완벽한 시스템 제어 그리고 테스트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 시스템이었다.

2014년 포르쉐는 중국에 지사를 설립한다. 이후 상하이는 중국시장을 위한 포르쉐의 개발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와 현지 기업들과의 연결을 위한 중요한 장소가 된다.

그리고 섀시, 일렉트로닉스 부품, 시스템, 테스트 자동화, 급속충전 및 기술 스카우팅등을 전문화했다. 2016년 포르쉐 엔지니어링은 루마니아에 자회사를 세우고 기능과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의 지식을 업그레이드 했으며, 체코에서는 2018년부터 포르쉐 엔지니어링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의 전문성을 강화했다.

포르쉐 엔지니어링의 팀은 미래의 포르쉐를 위한 솔루션을 포함해 다양한 요구사항에 대응할 전자 솔루션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국제적인 네트워크는 엔지니어가 완전한 모델 개발을 하고 고객에게 최종 결과를 보여줄 수 있도록 지원한다. 포르쉐 엔지니어링은 포르쉐 카이엔 쿠페를 통해 이를 증명해냈다. 서비스 공급자는 콘셉트와 테스트에서부터 2019년 생산과정의 모니터링까지 전체적인 프로세스 체인을 책임졌다. 

 

포르쉐 엔지니어링은 자동차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갖고 있다. 이 비전은 인지능력을 갖추고 학습하며 고객의 다양하고 늘어나는 요구사항에 점점 더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모든 데이터가 클라우드에서 검증되며 최적화되어 백엔드에 정보를 전달한다. 

그리고 '무선'으로 언제나 최신의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 할 수 있게 만든다. 이를 통해 자동차를 고객의 디지털 에코 시스템에 쉽게 통합하고 효율적인 전기차를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율주행 기능은 새로운 전자 아키텍처와 커넥티비티 콘셉트가 있을 때 실현된다. 전체 자동차 개발자로서, 포르쉐 엔지니어링은,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하는 네트워크를 포함한 새로운 기능들을 전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자동차 개발에서 멈추지 않는다

 

포르쉐 엔지니어링 개발 서비스는 전통적인 자동차 분야에만 머물지 않는다. 루거 게오르그 해클을 위한 썰매를 개발했고 주행중 댐핑을 바꿀 수 있게 해 코너링 속도를 더욱 빠르게 개선했다. 그 결과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 올림픽 은메달로 증명했다. 

2007년, 엔지니어들은 수상 스포츠 장비를 제작하는 카야고(Cayago)를 통해 씨밥(seabob) 스포츠를 위한 전자장비를 개발했다. 여기에는 배터리 매니저, 모터 제어장치, 그래픽 디스플레이가 포함된 제어 패널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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