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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카 개러지] 포르쉐 356 미르쉬(Miersch)의 자유로운 영혼

by 모빌리티그라운드 2021.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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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장막은 독일을 두개로 나누었지만, 공산당원이자 포르쉐의 팬들은 페리 포르쉐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스포츠카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1953년 6월 17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8년만에 소련군 병사들이 드레스덴에서 다시 행진을 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총성이 울렸다. 드레스덴에서처럼 동독 전역의 시민들은 소련에 의해 세워진 공산정권에 대항해 항거하고 있었다.  

아주 잠시 자유를 되찾은듯 했지만 볼크스폴리자이(Volkspolizei - 동독 인민경찰)와 붉은 군대(Red Army)가 전국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했다. 드레스덴은 여전히 많은 곳이 파괴되어있었다. 프라우엔 교회(Frauenkirche)와 같은 많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한스 미르쉬(Hans Miersch)는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 10년 전 작센 출신인 그는 전쟁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했고 그의 오른쪽 다리 일부를 절단해야만 했다. 드레스덴에서 불과 40km 떨어진 노센이라는 작은 마을에 그는 대담하게도 독일의 공산주의 지역에서 여성의 구두를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유재산에 대해 불쾌해했으며 대기업들은 국유화 되었고, 국민의 재산이 국가의 재산이 되었다. 법으로 경제를 계획하였고 민간이 주도하는 것들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미르쉬는 직업이나 사적인 영역에서도 그의 꿈을 빼앗길 수 없었다. 1950년대 초에 그는 서독에서 발행하는 자동차 매거진에서 신형 포르쉐 356을 발견하게 된다.

수십년이 지나 그날을 회상하면서, "처음 그 모델을 본 순간 이 차가 제 꿈이라는 것을 알았어요."라고 추억했다. 신발을 만들던 그의 꿈은 동서양의 수많은 팬들의 것과 같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현하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반으로 나뉜 독일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비록 동독과 서독을 여행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1961년 장벽이 세워지기 전까지였다. 두 독일은 교역에서도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심지어 미르쉬와 같은 기업가조차도 고급 자동차를 수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회사차는 하노마그(Hanomag) 보디와 예전 지프 스타일의 섀시를 가진 퀴벨바겐(Kübelwagen)이었다. 옛날 페르디난드 포르쉐가 Type82 타입으로 디자인 한 후륜구동 기반 오픈톱 4인승이었다. 그는, "그차는 아주 잘 달렸어요."라고 그 특별했던 차를 기억했다. 자체 제작한 트레일러를 장착한 그는 헝가리와 폴란드를 여행하며 그가 제작한 여성용 구두를 배달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까지 거리를 넓혔다. 

 

퀴벨바겐(Kübelwagen)은 마법같은 이야기의 시작이다

 

버려진 Type82를 발견하는 것은 동독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45년 그들이 허겁지겁 퇴각하면서 독일 병사들은 그 차들을 엘베강 동쪽의 둑에 남겨둔채 수영으로 강을 건너갔다. 그 때문인지 드레스덴 지역의 몇몇 농부들은 헛간에 퀴발바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 퀴벨바겐이 마법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드레스덴 공과대학의 21세 쌍둥이 학생이었던 포크와 누트 레이만 형제는 포르쉐 356과 놀랄만큼 비스하게 생긴 쿠페를 디자인했다. 미르쉬는 그것을 보고 깜작 놀랐다. 

레이만 엔지니어들은 드레스덴 인근의 모혼에 있는 코치빌더 아르노 린드너에서 또다른 동료들을 만났고 그들의 디자인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뼈대만 남은 차체를 가져와 볼트로 고정하고 섀시에 용접해 붙일 수 있도록 나무로 뼈대를 만들었다. 린드너는 다행이도 이런 작업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린드너의 할아버지는 이 원칙에 따라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르쉬는 동독에서 포르쉐를 갖겠다는 꿈을 위해 퀴벨바겐 섀시를 구입했다. 하지만 동독에서는 괜찮은 품질을 갖춘 판금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심각한 현실을 만나게 되었다. 미르쉬는 고민끝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30평방미터의 철판을 판금해오기로 했다.

미르쉬는, "당시 그 비용은 금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었어요."라고 말한다. 1mm 두께지만 꽤 무거웠다. 후드 하나만의 무게도 20kg이나 될 정도였다. 그리고 퀴벨바겐의 섀시가 포르쉐 356의 섀시보다 약 30cm 더 길고 넓었기 때문에 미르쉬의 356은 4인승이 되었고 결국 더 무거워질 수 밖에 없었다.

 

미르쉬는 결국 서독에서 동독으로 부품을 몰래 가져왔다

 

섀시와 드라이브트레인 부품을 찾기 위해 제대로 된 모험이 시작되었다. 포르쉐 356A의 브레이크 시스템은 페리 포르쉐의 개인적인 연락을 통해 서독의 딜러인 에드워드 윈터를 통해 받을 수 있었다. 미르쉬는 매번 땀을 뻘뻘 흘려가며 서독에서 동독으로 "아주 큰 서류가방"에 넣어 부품을 밀수했다. 

밀수는 동독에서 아주 엄격한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행위였다. 그는 "하루에도 몇번씩" 동독 군인들로부터 아주 무서운 감시를 받으며 국경을 넘나들었다. 그는, "특히 브레이크 드럼은 정말 너무나도 무거웠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조금씩 자동차의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7개월 후, 1954년 11월 수작업으로 만든 차가 드디어 도로를 달릴 준비를 마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때 서독에서 가져온 부품이 3,150개나 되었다.

처음에는, 미르쉬의 포르쉐는 30hp에 불과한 출력을 내는 박서 엔진을 탑재했고 1,600kg이 넘는 무게를 견뎌야했다. 오리지널 356 프로토타입의 무게는 절반정도였고 엔진 출력도 두배나 더 높았다. 1968년이 되어서야 미르쉬는 75hp의 출력을 내는 1.6리터 포르쉐 엔진을 탑재할 수 있었다. 그는 해체된 엔진을 자동차의 예비 부품으로 수입해 작업을 했는데 서류상으로는 서독의 친척에게서 받은 선물로 되어 있었다. 

린드너는 1950년대 중반에 동일한 프로토타입을 바탕으로 대략 12대의 쿠페를 생산했지만 정확한 숫자는 확실하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두명의 디자이너였던 레이만 형제는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하나의 쿠페를 만들었다. 그들 역시 주펜하우젠의 도움을 원하고 있었고 다행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56년 7월 2일 오가던 편지와 답장에 페리 포르쉐는, "당신들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우리는 앞으로 베를린에 있는 에드워드 윈터 딜러를 통해 당신들이 필요한 피스톤과 실린더 세트를 보낼 것입니다. 자체 제작한 포르쉐에 우리의 부품을 장착해 즐거운 드라이빙을 하기 바랍니다."라고 회신했다. 당시 사인은 페리 포르쉐의 비서가 했는데 페리 포르쉐는 르망에서 경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르쉐는 언제나 그들의 마음 속에 있었다

 

가능한 오랫동안 레이만 형제는 자체 제작한 포르쉐를 타고 유럽 곳곳을 여행했다. 여행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쌍둥이 형제는 몇년간 운전면허 하나를 번갈아 사용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몇년 동안 그들은 스위스 제네바,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를 거치며 수많은 여자친구들과 많은 사진을 찍었다. 

포르쉐는 언제나 그들의 마음속 한가운데 있었다. 두 형제가 스포츠카를 복제하고 서구 지향적인 생활방식을 하던 것이 동독의 비밀 경찰들에게 언제나 주의를 받고 있었다. 1961년 장벽이 세워진 직후 두 형제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발각되어 체포된 후 1년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들의 포르쉐는 그들의 투옥과 함께 흔적을 감추고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11년이 되어서야 오스트리아의 컬렉터인 알렉산더 디에고 프리츠가 이 차를 발견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동독에서 수작업으로 만들었던 포르쉐 중 단 2대만이 완전히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 2대는 바로 프리츠가 소유하면서 복원한 포르쉐와 한스 미르쉬가 소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차는 최초에 받았던 RJ 37-60 번호판을 포함해 첫번째 소유자의 손에서 계속 보관되고 있었다. 1970년대 초 미르쉬의 구두 사업이 국영으로 바뀌었을 때(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국가에게 빼앗겼을 때) 자동차만큼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

미르쉬는 아주 교묘하게 자신의 자동차를 보관하기 위해 전쟁에서 다친 장애를 위해 디자인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 차는 아주 특별한 것이에요. 장애인인 나를 위해 특별히 설계한 수제 차량입니다."라고 당시 이렇게 말했다. 당시 가치는 동독 화폐 기준 1,800마르크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전 구두 공장 주인은 방수 종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동독의 역사가 끝나갈 무렵, 미르쉬는 은퇴를 할 나이가 되었다. 그는 통일된 독일에서도 그의 소중한 자동차를 사랑했고 소중하게 관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포르쉐 356의 90hp의 출력을 내는 엔진이 이 무거운 차체에 탑재되면서 정상적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미르쉬의 356, 드디어 포르쉐 애호가의 품으로

 

1994년, 미르쉬는 그의 인생의 동반자였던 포르쉐356과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그는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 있는 포르쉐에 열정이 넘치는 마이클 되닝거라는 훌륭한 후계자를 만났다. 그 후계자가 포르쉐356과 함께 나타나는 곳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지곤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포르쉐 356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다르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했어요."라고 말하며 웃었다.

시간이 흐르며 미르쉬의 포르쉐 356도 몇가지가 바뀌게 된다. 예를 들면, 코냑 컬러의 가죽으로 시트를 바꿨으며, 전쟁 전에 만들었던 스피드미터를 오리지널 포르쉐 부품으로 바꾸는 등의 작업을 했다.

수 많은 작업이 이루어졌지만, 미르쉬는 현대사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으로 남아있다. 세계가 동서로 나뉘는 시대에 만들어졌고, 사람들이 여전히 자동차에 대한 꿈을 스스로 이루어 낼 수 있었던 시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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